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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를 받을 때 박은호 201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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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크게 오해를 받아본 적이 있나요?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경험인줄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군가를 크게 오해해 본 적이 있나요?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 제가 그 때 그 사람을 오해했었어요.” 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혹시 지금 누군가를 오해하고 있나요? 이 질문에 너무 쉽게 아니라고 하지 마십시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누군가를 오해하고 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 대한 나의 생각과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1 17절 이하는 사도 바울이 오해받고 있는 사건을 다룹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주고 받는 정도의 오해가 아닙니다. 바울은 오해하는 무리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드디어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20년만에 선교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바울을 환영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야고보를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힘든 얘기도 듣게 됩니다. 바울의 이방인 선교 사역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수만 명의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있는데, 그들이 바울을 율법을 무시하는 자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평범한 유대인들에게 있을 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오해했던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분명하지 않은 정보 때문에 오해가 생깁니다. 21 21절에 그들이 들었도다라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뭘 들었을까요? 수만명의 유대인들이 말하길, 바울이 모세를 배반하고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언제 그런 얘기를 했나요? 바울은 오직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구원받는 조건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왜 오해가 생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해는 정확하지 않는 정보를 듣기 시작하면서 생깁니다. 그리고 그 정확하지 않는 정보가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계속 옮겨가다 보면 전혀 다른 얘기가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두 농부가 은행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한 농부가 말합니다. “사과 농사로 8만불을 벌었다면서요?” 다른 농부가 대답합니다. ”, 제가 아니구요. 제 동생 얘기네요. 그리고 사과가 아니라 감자 농사였지요. 그리고 8만불이 아니라 8천불입니다. , 그리고.. 8천불을 번 것이 아니라, 8천불을 손해 봤지요.” 보세요. 말이 돌고 돌는 사이에 내용이 다 바뀐 것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전해주는 분명하지 않은 정보는 이미 앞 뒤가 다 잘린 말일 수 있습니다. 말의 앞 뒤를 다 자르고, 그가 어떤 의도로 말을 하려고 했는지 그 말의 뉘앙스도 다 무시한채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어.” 라고 하면서 말을 옮깁니다. 그리고 대화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설마, 정말 그랬어?” “내가 분명히 그렇게 말하는 거 들었다니까.” “, 그 사람이 그렇게 얘기했구나.”

 

정보가 분명하지 않은 얘기들이 들려올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이런 말 하지 말고,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를 가지고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아니 땐 굴뚝에도 얼마든지 연기가 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랬다더라는 성도들이 해야 할 말은 아닙니다.  

 

또 한가지, 선입견 때문에 오해가 생깁니다.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가 유대인들에겐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해하고 싶은 것이다라는 말이 더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야고보와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의 오해를 풀어주는 방법으로 유대인들이 율법에 따라 행하는 결례를 바울에게도 행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7일간 성전에 들어가 정결하게 하는 예식을 행합니다. 그런데 어떤 유대인들이 성전에 있는 바울을 보고, 그가 이방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을 더렵혔다고 생트집을 잡습니다. 원래 율법에 따르면 성전에는 이방인들이 못 들어갑니다. 이방인들은 이방인의 뜰 까지만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른 날에 이방인들과 시내에서 같이 다니는 것을 보고 성전에도 같이 들어간 것 처럼 착각해서 생트집을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폭행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21:22-31). 무슨 말인가요? 바울에 대한 선입견이 있으니까, 바울이 그랬을거라고 아예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오해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미 그 사람에 대해 못마땅한 생각을 내가 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 그 사람을 오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내가 듣고 싶은 얘기만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좋은 말은 많이 해도 안 듣다가, 어쩌다 그 사람이 이상한 말 한 마디 하면 거기에만 집중합니다. “그렇지, 저 사람 또 저런 얘기 하지!” 이런 식입니다. 선입견은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젊었을 때 취직 시험만 보면 떨어졌다고 합니다. 자꾸 떨어지니까 궁금해서 관상을 공부했답니다. 공부해보니 자기 관상이 너무 나뻐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실망해서 지내다가 어느 날 깨달음을 얻었답니다. “관상보다 중요한 것은 심상이다!” 그 때부터 마음을 잘 가꾸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존경하는 민족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성경은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9). 사람을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특징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나도 편견이 있을 수 있다는, 그래서 누군가를 오해할 수 있다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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